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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2013-03-22 14:38:34 | 1,374
1. 분묘       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로 무덤, 뫼, 묘(墓), 영(塋), 총(塚), 분(墳)으로 부르며, 임금이나 황제의 묘는 능(陵)이라 부릅니다. 묘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사체 처리물이라는 설과 죽은 사람의 기념적 형상물이라는 설입니다. 사체 처리물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곧 부패하여 악취가 풍기고 보기에도 흉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사체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처리 방법으로 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무덤 또는 뫼를 나타내는 한자어(漢字語)로는 묘(墓)·총(塚)·영(塋)·분(墳) 등이 있고, 제왕(帝王)의 무덤은 특히 능(陵)이라 하여 구별하여 씁니다. 원래 '총'은 흙을 쌓고 나무를 심은 무덤, '묘'는 흙을 쌓는 대신에 건조물을 세운 무덤 등으로 차이가 있었으나 현재는 혼용되며, 일반적으로 이들을 총칭해서 분묘라 합니다. 한국의 묘제(墓制)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영혼불멸(靈魂不滅)의 신앙과 함께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싹텄으며, 그뒤 여러 가지 형태로 분묘를 만들었읍니다.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다리를 구부리게 하는 굴신장(屈身葬)과 다리를 곧게 뻗친 신전장(伸展葬)의 두 가지가 있으나, 한국의 경우는 신전장만이 시행되었읍니다. 그리고 대개는 시체의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였는데, 이를 동침신전앙와장(東枕伸展仰臥葬)이라 합니다. 2. 묘지의 형태   1) 봉분(封墳)의 모양에 따라   ㆍ원형분(圓形墳) - 봉분이 둥근 모양     ㆍ방형분(方形墳) - 봉분이 모가난 모양으로 주로 장방형(직사각형)이 많음   ㆍ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 봉분이 앞부분은 모서리가 있고 뒷부분은 둥근 모양 2) 봉분의 재료에 따라   ㆍ토장묘(土葬墓) - 봉분을 흙으로 덮은 묘지   ㆍ지석묘(支石墓) - 세운 돌 위에 큰 돌을 얹은 묘지. 예)강화 지석묘 . 대덕 내동리 지석묘 . 청원군 지석     묘   ㆍ적석총(積石塚) - 돌을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든 묘지.   ㆍ석총(石塚) - 돌로 된 묘지   ㆍ토총(土塚) - 흙으로 된 묘지   ㆍ전축분(塼築墳) - 벽돌을 쌓아 봉분을 만든 묘지   3) 유구(遺構 - 관)의 재료에 따라     ㆍ석관묘(石棺墓) - 관을 돌로 만든 묘지 ㆍ석곽묘(石槨墓) - 시신 주위가 작은 석실로 된 묘지 ㆍ목관묘(木棺墓) - 관을 나무로 만든 묘지 ㆍ목곽묘(木槨墓) - 시신 주위를 나무로 궤 모양으로 만든 묘지 ㆍ옹관묘(甕棺墓) - 관을 옹기로 만든 묘지. 예)부여 송국리 독무덤 ㆍ도관묘(陶棺墓) - 관을 도자기로 만든 묘지 3. 무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합니다. 생전의 집을 양택으로 부르는 반면에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무덤을 음택 또는 유택으로 부릅니다. 이것을 분묘로 부르기도 합니다. 무덤은 지하에 시체를 매장하고 그 위에 특별한 시설을 한 것입니다. 흙으로 쌓아 둥그런 형태를 한 봉분이 그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죽으면 피장자가 살던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됩니다. 히말라야 지역의 조장, 겐지스강 유역에서 행해지는 화장, 해군이나 바다에서 어부들이 이용하는 수장, 전라남도에 최근까지 있어왔던 풍장에 유사한 초분과 그후 육탈된 뼈만 다시 묻는 이차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장법은 그 지역 또는 그 종족들의 문화를 대표합니다. 통과의례의 관혼상제 중 상이 바로 무덤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화는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 남기 위한 전략으로 의ㆍ식ㆍ주로 대표됩니다. 여기에 사후 처리 방식 중의 하나인 묘제 또는 장법도 추가됩니다. 이 묘제나 장법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그 시대의 문화의 하나로서 대표하게 됩니다. 또 묘역이나 구조와 함께 묻히는 껴묻거리(부장품)에 따라 피장자의 신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무덤만큼 계급사회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4. 인류 최초의 무덤형식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 가족이나 친지들이 마지막 장송으로서 시신에 예의를 표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라크 북부 쟈그로스 산맥의 중기구석기 시대의 무스떼리앙 문화층에 속하는 샤니다르 동굴에 묻힌 시체 주위에는 인위적으로 꽃이 뿌려진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연대는 최소한 5만년 전으로 정성을 다해 매장한 인류 최초의 무덤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집트 신왕조 18왕조 때 아멘호텝 3세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여 9년간의 재위(기원전 1358~1349년)를 한 투탄카멘왕은 18세에 요절했는데, 그의 관 뚜껑 위에는 과부가 된 소녀 왕비가 마지막으로 남편을 작별하면서 놓아둔 화관이 있습니다.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3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해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라남도 나주 반남면 복암리 3호분 중 5호 석실묘의 경우 횡혈식석실(굴식돌방무덤) 입구에 규두 대도가 한 자루 놓여 있는데 이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죽었을 때, 가야 지방에서 온 친구나 조문사절 중 한 사람이 마지막 장송예물로서 그의 칼을 풀어 놓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때가 기원 후 5~6세기 경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의 일입니다. 죽은 시체는 묻힌 장소에 따라 발견되기도 하고 영원히 사라져 없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토양이 산성으로 묻히는 즉시 시체를 분해되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동토지대에 묻힌 경우가 그러합니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록 외짤 계곡(현재 이태리령)에서 발견된 외찌인의 경우 5000년 전 목동으로 산에 올랐다가 하산도중 실족이나 일기불순으로 방향을 잃고 죽은 후 빙하 밑에 묻혀 그대로 냉동되었습니다. 그의 시신과 몸에 지닌 옷과 유물들은 의학, 해부학(형질인류학 또는 법의학)과 고고학의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물밑, 늪지대와 토탄(니탄)층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덴마크 톨룬드에서 약 2000년 전 초기 철기 시대 목매달아 죽은 죄수 또는 희생당한 사제로 여겨지는 시체가 토탄층에서 발견되어 그들이 죽을 때의 평안한 표정과 함께 사형(교살)전 먹던 음식까지도 파악됩니다. 즉 죽기 12~24시간 전 마지막 먹은 식사는 보리, 아마씨와 야생풀을 섞은 오트밀이었습니다. 이런 예로는 중국 호남성 장사의 한대 고분인 마왕퇴 1호를 들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그곳 대후 이창의 부인으로 죽을 당시 그대로 피부의 광택과 탄력을 가진 미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묻힌 관(네 번째의 마지막 내관)의 옻필과 그 주위에 넣은 숯 때문으로 밝혀졌다. 숯이 방부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시신의 해부결과 피장자의 신장은 154㎝, 몸무게 34.3㎏(생전 70㎏의 비만형), 나이 50세 전후, 흰머리는 없으나 가발을 썼고 위벽은 얇아져 있으며 죽기 2~3시간전 참외를 먹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인은 관상동맥성 심장병이며, 이외에 담석증, 결핵, 류마티스를 비롯하여 요골과 골반 아래뼈의 골절 후 변형흔적까지도 보여줍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은 해인 기원전 186년보다 몇 년 뒤에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외에 시신이 썩지 않고 발견되는 곳은 알칼리성이 많은 곳, 건조한 사막지대, 석회성분이 많은 동굴 등이 해당됩니다. 알칼리 성분이 강한 토양은 케냐의 나이로비 투르카나호수 옆, 이디오피아의 아라미스와 하다르지역 등이며 이곳에서는 인류최고의 조상인 화석인류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44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에톨리인(350만년 전)과 루시(300만년 전)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선사시대의 패총(조개더미, 조개 무덤)은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조개와 같은 어패류를 따먹고 버린 쓰레기터인데, 어패류 자체가 탄산염으로 빗물에 녹으면 알칼리성을 나타내 함께 버린 유기질이나 인위적으로 묻은 시신등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부산 영도구의 동삼동 패총(사적 266호)이 우리나라에선 대표적입니다. 페루의 안데스 산맥의 서쪽 해안가는 사막지대로 챠빈-모체-나쯔카-치무-앙리-잉카 등의 무덤으로 쓰이고 그 안에서 당시의 미라가 수의를 입은 채로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을 흥분시켜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의 회곽묘를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시신을 안치한 목관을 모래, 자갈과 회로 반죽한 당시의 콘크리트인 삼물회로 외곽을 만든 후 그 위에 봉토를 씌운 무덤입니다. 그런데 삼물회의 회성분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목관 애의 시신이나 수의가 묻힐 때와 똑같은 상태로 발견되어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비록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하지만 사람이 죽어 자연적으로 남아 있게된 무덤이자 음택인 셈입니다.     5. 왕능   역사상 한국의 왕릉은 삼국시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무덤 양식이 각기 달랐습니다. 통일신라 때에 왕릉 형식의 기본이 이루어지면서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집니다. 고구려의 고분은 퉁거우[通溝]와 평양 부근에 산재해 있습니다. 고구려 전기의 고분은 외형으로 보아 주로 돌무덤[石塚]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장군총(將軍塚)이 있습니다. 장군총은 만주 지안현[輯安縣] 퉁거우에 있는 7층 네모진 계단식 돌무덤으로 그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있습니다. 이 고분은 널방[玄室]에 벽화가 없고 각 층의 넓이와 높이를 줄여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구려 후기의 고분은 흙무덤[土塚] 형식으로 변하여 내부 구조는 이 돌방[石室]으로 된 굴식[橫穴式] 돌방무덤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 벽화가 있다. 이와 같은 고분은 도굴이 용이한 것이 특징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무덤으로는 쌍영총(雙楹塚)과 강서대묘(江西大墓)가 있으며, 이들은 널길[羨道]과 널방을 갖춘 웅대한 것으로, 특히 쌍영총은 서방 계통의 영향을 받아 앞방[前室]과 뒷방[後室] 사이에 8각형의 돌기둥이 서 있습니다. 이들 후기의 흙무덤은 내부에 그린 벽화가 다양하여 그 시대의 풍속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제 때의 고분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석촌동 고분으로 졸본(卒本)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돌무지무덤[積石墳]이며, 웅진시대의 공주 송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과 무령왕릉(武寧王陵)이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능은 연화무늬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塼築墳]으로, 이때 발견된 유물로는 금관 ·돌짐승[石獸] ·동자상(童子像) ·자기 ·철전(鐵錢) 등이며, 특히 지석(誌石)에 쓴 명문(銘文)은 당시 연대와 사회상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송산리 고분은 소박하고 고졸합니다. 제3기 사비시대(泗時代)의 능산리(陵山里) 고분은굴식 돌방무덤으로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무늬 사신그림[四神圖]의 벽화가 세련된 점이 특징입니다.     6. 고인돌       고인돌은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한요소로 파악되는데 거석문화란 거석을 이용한 구조물을 가진 문화를 의미하며 크게 보았을때 이집트나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Pyramid) 오베리스크(Obelisk), 중동지방의 각종 석조물, 영국의 Stone Henge, 프랑스 Cargnac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이 거석문화의 산물입니다. 이외에도 Easter섬의 Moai, Mal'ta의 신전 등이 거석문화의 잔재로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인돌외에 선돌(Menhir)이 거석문화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함경북도 지방을 제외한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 북구주와 화중지방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중국 해안지방과 요동반도 지방에도 분포하고 있습니다. 보다 넓게는 북유럽과 서유럽,지중해 연안지방을 거쳐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영국,스위스 등에도 분포되어 있으며 아시아에는 인도 남부, 자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오키나와 등지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인돌 분포지역중 가장 밀집되어 분포하는 곳은 우리나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인돌은 드물게는 산의 높은 위치에 자리하기도 하나 주로 해안이나 강을 따라 그 옆 또는 약간 높은 구릉위에 놓여 있습니다. 고인돌이 가장 밀집하여 분포되어 있는 전라도지방의 경우 대체로 해안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해안가에 자리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보다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온 지역의 하천등을 따라 분포합니다. 전북지방의 경우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고창,부안,김제,군산 등에 비교적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일선 동부 산간지역인 남원,정읍,장수,무주 등지에도 고인돌이 분포합니다. 이처럼 도내 거의 전지역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나 분포의 중심은 고창군입니다. 특히 전라북도내 다른 지역과 달리 고창군의 고인돌은 군집을 이루는 경향이 강하며 그 군집의 규모도 10여기에서부터 죽림리 일대에서 파악되는 바와 같이 수백 기에 이릅니다. 이같은 대규모의 군집을 이루는 것은 전남지방의 경우에도 볼 수 없는 것이며 전남지방의 경우 50~100기가 분포된 것을 예외적인 대규모 군집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고창군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나 1984(전북대), 1987(전북대), 1990(원광대) 등의 조사를 통해 85개소 이상에서 2,0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고창군은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며 고창군에서는 죽림리.상갑리 일대가 가장 밀집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고인돌의 성립이 이 일대에 집중되어 하나의 특수한 지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에 대한 중요한 특징으로 강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고창군 고인돌유적은 당시인들의 주검을 묻기위해 마련한 묘제로서 큰 규모의 돌로 축조할 수 있었던 축조방법 및 기술, 대규모의 밀집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은 매우 신비롭고 중요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결국 죽림리.상갑리 일대 고인돌유적은 거석문화의 산물로서 가장 밀집 분포된 고인돌유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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